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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신동철|길, 꽃, 나무와 함께 떠나는 생명예찬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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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철의 그림살롱 100회|한국화가 신동철 ‘산야’ 연작

올레길-한라산 가는 길, 60×132㎝ 장지에 수묵담채, 2009

올레길-한라산 가는 길, 60×132㎝ 장지에 수묵담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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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듯 모를 듯한 배꽃향기 아래서 봄비 맞았었지요. 신혼처럼 봄은 짧았습니다. 꽃도 다정(多情)있어 젖으며 떨어지나요. 소리없이 쏟아진 하얀 꽃잎 위에 아침 햇살이 반짝입니다.

여명(黎明)의 청보리밭은 누렇게 부풀어 익은 몸통을 뒤척이며 곤한 잠에 빠졌군. 내리막이 있어야 평평한 길을 만나게 되는 법. 비가 오면 알게 되지. 길섶 풀이며 논이며 밭으로 골고루 물이 흘러들어가는 이치를. 벌었다, 날렸다 큰소리로 떠들지만 밭둑에 앉아 보리밥에 냉수 한 그릇 맛 모르면 인생대화가 되질 않아. 바람 불면, 빗줄기 몰아치면 맨발로 제일 바쁜 건 ‘나’겠지. 젖은 흙길엔 밤새 이곳저곳 넘나든 뜨거운 청춘의 개구리, 님 부른 울음 발자국들 낙서처럼 어지럽네.
아침에 산을 가는 건 산이 거기 있기 때문. 그곳은 또 하나의 세상. 일 만한다 놀리지만 기다림의 진미를 잘 모르고 하는 말. 언제나 정면으로 마주하지. 오늘도 먼동이 트는 저 산(山)을 당당하게 만나러 가는 힘찬 새벽길이여.
매화가 피어있는 담벼락, 72×27㎝, 2012

매화가 피어있는 담벼락, 72×27㎝,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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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도 헤어짐도 놓고 숙연이 가자꾸나
새싹처럼 발돋움하던 설렘이 상처를 입었나. 하얀 눈송이 같은 고매(古梅)의 흰 꽃이 폭풍한설에도 참았던 비애의 고통을 용틀임했다. 수백 년 기품의 흙담 기왓장이 단숨에 내동댕이쳐졌다. 눈물 나도록 햇살 맑게 부서지는 양지바른 담장에 보슬비처럼 이백 오십년 묵은 황토가루가 가을비처럼 흘러 내렸다.

그윽한 향기 짜릿한 전율이 손끝을 타고 들어와 닫은 문을 부드럽게 열었다. 가슴에 단 한번 스친 것뿐인데 그렇게 흔들리는가. 정녕 정적을 깰 수 있단 말인가. 기이하고 예스러운 휘어진 검은 가지가 기어코 흐느낀다. 대(竹)가 매화의 등을 토닥인다. ‘숙연이 가자. 만남도 헤어짐도 못다 이룬 뜨거운 연정일랑 담 밖으로 던져 돌아서자’했다.

명사십리-청해진, 140×261㎝, 2012

명사십리-청해진, 140×26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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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무엇을 그토록 그리워했기에 저리도 울먹이며 꽃을 피우나. 유현(幽玄)의 공간에 실존하는 꿈틀거림.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매향이 허공 속에 아지랑이처럼 번졌다. 정감에 사색의 끈을 놓은 은일(隱逸)한 선비가 담장을 지나다 목 줄기에 흙가루가 불그스름 배었으니 그도 어이 길을 떠날 것인가. “一夜飛花千片 하룻밤 휘날리는 꽃은 천 조각이요 / 繞屋鳴鳩乳燕 우는 비둘기나 어미제비 지붕 맴돌고 있네./ 孤客未言歸 외로운 나그네 아직 돌아가지 못하니 /幾時翠閨芳宴 어느 때 비취빛 규방에서 꽃 잔치를 여나.”<‘다산 정약용의 편지글’ 중 ‘如夢令寄內’詩 일부. 이용형 著>
명사십리 해송 넉넉히 자리내준 돌 평상에 앉아 여정의 봇짐을 풀어놓는다. 에메랄드빛 바다는 차라리 투명한데 저리도 긴긴 문장 같은 곱디고운 백사장에 무슨 사연을 쓰고 또 지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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