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철의 그림살롱 105회 | 서양화가 이강화 ‘소멸과 약속 그리고 인연의 공간’ 연작
숲길을 오른다. 엷은 땀으로 스치는 유쾌한 아침의 공기. 새들이 지저귄다. 실바람이 명랑한 노래처럼 살포시 윙크한다. 아침의 가벼운 산보에서 피어나는 나의 삶!
발돋움만큼 구름이 오가네. 말쑥한 바람 속을 새털같이 가벼운 맨발로 걷네. 키 작은 하얀 구름은 서성이다 맴돌다 허공에 떠오른다. 그리운 마음의 행로였을까. 당신은 아득한데 젖은 눈에 흩날리는 두화(頭花)가 손짓한다. 돌아보면, 그렇게 시작된 것인가. 처음엔 느릿느릿 이는 저 유운(流雲)처럼. 그러나 어느덧 반짝이는 나의 별이 되어버린 마법의 능력이었음을.
엉겅퀴 야생화가 피어난다. 미풍에 매끄럽게 날리는 흰머리처럼 자줏빛 꽃망울을 받쳐든 흰털은 너무도 눈이 부셨다. 상흔(傷痕)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잎이며 톱니 같은 줄기는 오히려 치열한 생명력에서 발산되는 열정의 빛깔이었다. 꽃이 꽃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얼마나 곡진한 시간을 참아왔는지, 보라. 흔들림 없이 스스로의 능력을 익히며 순수하게 완전한 세계를 이뤄낸 저 작은 출발의 기적을. 그리고 끝내 화관(花冠)을 이룩한 저 심오(深奧)한 산물을. 엉겅퀴 꽃이 나를 산책시킨다. 아아, 충만한 위안에 피어나는 마음의 꽃. 영원한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인가.
다시 살아나는 그리움의 편린들
그림자 없는 나팔꽃이 이슬을 머금고 그리움으로 만개했다. 한 뼘씩 그렇게 오르며 세월에 녹아든 나무의 결을 돋보이게 하는 절제. 자신을 희생하며 피어나는 꽃을 어느 누가 덧없는 사랑이라 했나.
향기가 스며온다. 따뜻하고 온화한 손길이 나를 안는다. 가슴 저민 그리움의 편린들이 조용히 살아난다. “한 쪽 시력을 잃은 아버지/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씨를 환약인줄 알고 드셨다/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정호승 詩, 나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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