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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시멘트 바닥서 죽은 그녀는 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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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행동 등 55개 노동인권사회단체, "노숙인 복지지원 절실"

▲ 홈리스행동, 전국홈리스연대 등 55개 노동인권사회단체들이 지난 21일 서울역 광장에서 '2012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추모제'를 열고 있다.

▲ 홈리스행동, 전국홈리스연대 등 55개 노동인권사회단체들이 지난 21일 서울역 광장에서 '2012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추모제'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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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무언가를 요구한 적도 욕심도 없이 그냥 순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빌 언덕이 없었다는 게 제일 큰 어려움이었을 겁니다."

홈리스로 살다 세상을 등진 고(故) 박모(38·여)씨에 대한 한 사회복지 활동가의 말이다. 박씨에겐 '순덕씨'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말이 없고 착한 박씨에게 복지 상담원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고아원 출신인 박씨는 성인이 된 후 노숙을 시작해 20년 남짓 거리에서 살았다. 사회생활 초기엔 공장 근로자로 일하기도 했지만 지적 장애가 있는 그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박씨는 주로 영등포역 주변의 공원이나 공터에서 생활했다. 한곳에 머무르다 관리인에게 쫓겨나면 다른 공원으로 잠자리를 옮기는 식이었다. 그는 말도 마음도 닫은 채 차가운 생활을 견뎠다. 지난 달 21일 새벽 은신처나 다름없던 고가 밑 공터에서 박씨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나마 안면을 터왔던 상담원과의 작별도 없었던 쓸쓸한 죽음이었다.

50대 초반의 남자 노숙인 김모씨도 얼마전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김씨는 홈리스들이 자립의지가 없고 불성실하다는 편견을 깬 인물이다. 김씨는 지난 90년 대 말 불어 닥친 IMF 한파에 사업이 도산한 후 알코올에 의존하게 됐고 가족과의 사이도 멀어졌다. 술 때문에 유일한 가족인 딸과의 연락도 단절된 후 홈리스가 됐다.

이후 김씨는 쉼터 생활 중 동료의 소개로 택시회사에 들어가게 됐다. 운전을 하게 되면 술도 끊을 수 있고 가족과의 재결합도 이룰 수 있겠다는 꿈이 생겼다. 회사 근처에 고시원을 잡아 택시를 몰 정도로 일에 몰두했다. 번 돈은 함부로 쓰지 않았고 1750만원 가량을 모아 쉼터에서 뽑는 저축왕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뇌경색으로 그의 생명과 꿈이 모두 사라졌다. 그를 기억하는 한 여성 활동가는 "남들보다 조금 더 실패했을 뿐 살려는 의지는 보통사람들과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고 말했다.

박씨와 김씨처럼 수많은 노숙인들이 턱없이 부실한 복지지원제도 속에서 심하게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거나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8월 서울역 노숙자에 대한 퇴거조치가 시행됨에 따라 노숙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더 깊어지고 있다는 게 인권단체들의 주장이다.

이동현 홈리스행동 집행위원장은 "서울역 노숙인 퇴거조치는 노숙인이라는 사회취약계층에 대한 신분적 차별"이라며 "특수경비용역 예산을 폐지하고 이들을 돕기 위한 사회복지 인력을 충원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집계된 노숙인 사망자수는 2000년 142명에서 2009년 357명으로 지속적으로 늘었다. 또 노숙인구의 사망률은 전체 인구집단에 비해 2배가량 높다. 사망원인은 손상, 중독, 외인성 질환이 많았고 다친 후 제대로 조치를 받지 못한 사례가 가장 흔했다.

이 위원장은 "쉼터에 머무르지 않는 노숙인들은 생사여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면서 "현실이 이러한데도 노숙인 현황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미비하고 응급 의료지원도 턱없이 부실하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올해 서울에서 사망한 노숙인수는 손수 집계한 것만 따져도 90여명에 이르고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본다"며 "노숙인 한 사람당 100만원의 지원금이면 충분히 자활을 도울 수 있는데도 정부는 그들을 쫓는 데만 급급해 예산을 거꾸로 사용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노숙인 스스로가 퇴거조치에 따른 무력감으로 정신적 손상을 입고 자활의지를 상실하는 것도 또 다른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 8월 '서울역 노숙인 퇴거조치 1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의 60%가 퇴거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퇴거 과정에서 이들은 정신적·물리적 손상을 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대해 활동가 박사라씨는 "노숙인을 사회와 동떨어진 범죄자처럼 여기는 인식이 무엇보다 개선돼야 한다"며 "실제로 만나본 그들은 욕구도 적고 학습된 무력감으로 위축돼 있는 경향이 강하다. 한마디로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옮겨 다닐 뿐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21일 서울역 광장에서 노숙인 추모제가 열렸다. 고인이 된 홈리스들의 넋을 기리고 실질적인 노숙인 복지지원제도를 촉구하기 위해 55개 노동 인권 단체가 개최한 행사다.



장인서 기자 en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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