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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김명인의 '꽃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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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 돌무더기가 만든 작은 틈새/스치듯 꽃뱀 한 마리 지나갔다/현기증 나는 벼랑 등지고 엉거주춤 서서/가파른 몸이 차오르던 통로와 우연히 마주친 것인데/그때 내가 본 것은 화사한 꽃무늬뿐이었을까/바닥 없는 적요 속으로 피어올랐던 꽃뱀의 시간이/눈앞에서 순식간에 제 사족을 지워버렸다/아직도 한순간을 지탱하는 잔상이라면/연필 한 자루로 이어놓으려던 파문 빨리 거둬들이자/잘린 무늬들 그 허술한 기억 속에는/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말의 블랙홀이 있다(......)

■ 부여 궁남지 한복판에 있는 정자 '포룡정(抱龍亭)' 바로 앞 돌축대 틈바구니로, 마악 사라지는 아름다운 뱀을 보았다. 김명인이 진저리쳤던 무엇이, 그때 내게도 들이닥쳤다. 백제 무왕의 어머니가 용을 껴안는 태몽을 꾼 뒤 세웠다는 그 정자 앞에서, 용두사미(龍頭蛇尾)의 진경을 본 듯, 캄캄한 구멍 속으로 뱀은 사라졌다. 화사(花蛇)는, 은유 그 이상이다. 그 아름다운 무늬가 징그러운 육신에 아로새겨져 꿈틀거리는 모습은 하나의 역설이다. 뱀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바닥으로 기는 긴 몸뚱이와 돋은 비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입 속에 감춘 날카로운 이빨과 낼름거리는 혀, 그리고 살상을 겨냥한 독기 때문이다. 사람도 때로 저 뱀처럼 닥쳐드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용을 껴안은 포룡정의 뱀처럼, 사랑과 존경의 혀를 낼름거리며 스며들지만, 목표물을 빨아들인 다음에는 냉혈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입을 있는 대로 벌려 이빨을 드러내고 독을 뿜는다. 아름다움이 지닌 치명적인 살기(殺氣). 신문 사회면에 종종 등장하는, '꽃뱀'이란 표현만큼 실감나는 공포도 없다 싶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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