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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6장 봄비 내리는 아침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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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6장 봄비 내리는 아침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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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비는 계집아이의 속삭임처럼 간지럽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는 새색시의 걸음걸이와 같기도 하다. 여름비나 가을비, 겨울비와는 분명 다르다. 여름비는 씩씩하고 소란스럽다. 가을비는 늙은이의 중얼거림처럼 청승스럽고 우울하다. 뼈속까지 냉기가 파고드는 겨울비는 외롭고 철학적이다.
그에 비해 봄비는 얼마나 부드럽고 다정한가. 부드럽고 다정한 속삭임 같은 봄비는 겨우내 잠들어있던 땅 밑과 땅 위의 모든 싹들에게 귓속말을 전할 것이다.

그만 일어나렴. 이 게으름뱅이들아!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잎눈과 꽃눈들은 일제히 눈을 뜨고 눈부신 봄을 향해 힘찬 기지개를 켤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시인 T.S. 엘리어트는 그의 장시 <황무지> 첫머리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흔들어 깨웠으니...’ 하고 노래를 했는지도 모른다. 잔인하다고 표현한 것은 역설일 뿐이다. 죽은 것처럼 숨 죽여 잠들어있던 모든 생명을 깨워서 일으키는 모양을 그렇게 짓궂게 표현한 것일 터이다.

아침을 먹고, 봄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하림은 노트북을 꺼내놓고 식탁 앞에 앉아 배문자로부터 받은 숙제를 하고 있었다.
“펑크 내면 안 돼. 이게 얼마나 중요한 기획인지 몰라.”
배문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면서 선불 인세까지 챙겨주었다. 그러니까 그녀를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펑크를 내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 도무지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세상에.... 전쟁이 인간의 진화에 미치는 영향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기껏 만화에 불과한 것인데 제목 하나는 비비씨 다큐멘타리에 나와도 될 법 할 만큼이나 거창했다. 아무튼 그것은 저들의 사정이고 자기는 그것에 걸맞는 재미있는 줄거리만 짜주면 된다.
“좀 잘 살어, 인간아.”
그래도 배문자는 하림이 걱정스러웠는지 그렇게 말했다. 한때 그녀와도 가까웠던 시간이 있었다. 친구이면서 애인이기도 했던 그 시절, 콧구멍만 했던 그녀의 반지하 자취방과 이마를 맞대고 후후 라면을 먹던 풍경이 떠올랐다. 오늘처럼 비 내리던 날, 이불에 비스듬히 기대어 창밖을 보면 커다란 목련나무 발치가 눈에 들어왔다. 목련나무 발치엔 누렇게 색이 바랜 꽃잎이 수북히 쌓여 비를 맞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를 생각해서라도 이번 맡은 일은 확실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대박이라도 터진다면, 물론 꽁지머리 이름으로 나오긴 하겠지만, 그녀의 애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보답이 될 것이다.
.....청동기 시대, ‘모헨조다로’라는 곳이 있었다.
만화대본의 첫머리는 그렇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두드렸다. 그리고나서 손을 놓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인더스 강가 풍광 좋은 위치에 지어진 도시 모헨조다로는 평화로웠다. 눈부신 태양이 넘실대며 흘러가는 강 위를 비추고, 키 큰 나무들 사이로 흙으로 빚어진 건물들이 보인다. 바둑판처럼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는 자갈과 돌로 단단하게 다져져 있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따라 잘 지어진 이층집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집집마다 베란다에는 꽃으로 장식되어 향기가 바람에 날리고, 상수도에서는 온종일 맑은 물이 흘러나온다. 도시 중앙엔 넓은 대중탕이 있어 누구나 이곳에 와서 목욕도 하고 이웃과 방담을 하며 즐긴다. 오만명이 모여 사는 이 도시의 어딜 가나 아이들과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무려 4000년 전에....!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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