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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1장 뒤꼬인 사랑의 방정식(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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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1장 뒤꼬인 사랑의 방정식(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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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젊었을 적 러시아 시골 마을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오.” 수관 선생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새벽 무렵 얻어 탄 트럭이 나를 작은 마을에 내려주었는데 근처에 수도원이 있었지요. 이른 새벽이라 어디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나는 마침 수도원의 열린 뒷문으로 안으로 들어가보았지요. 수도원은 강가에 자리 잡고 높은 벽으로 둘러쌓여 있었어요. 강의 일부는 수도원으로 들어와 흘러가고 있었어요. 잡초가 우거진 뒷마당을 지나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까 돌로 포장된 정갈한 소로가 나타났어요. 모든 풍경은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지요. 아주 깊은 정적에...... 그런데 그 길을 따라 새벽 안개 속에서 머리까지 흰 망토와 검은 망토를 걸친 수사들이 나타나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지요. 때마침 높은 종마루에서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대앵대앵, 하고 울려퍼졌어요. 순간, 나는 말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오. 문자 그대로 전율을..... 나는 원래 종교가 없었지만 그 순간 어떤 거룩한 힘이 나를 감싸주는 듯한 황홀한 느낌에 사로잡혔던 거요.” 그는 마치 그 순간을 기억해내듯이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열어놓은 문 밖에서 닭들이 서로 쫒는 소리가 한가롭게 들렸다.
“거기엔 러시아 정교의 오랜 전통과 영적인 경건함 같은 것이 깃들어 있는 느낌이었다오. 또스또예프스키의 영혼을 뒤흔들어놓고, 톨스토이의 결단을 불러 일으켰던 바로 그 힘 말이오. 그게 종교적이라 하든, 혹은 인간적이라 하든 상관이 없을 거요.” 그리고나서 그는 남경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이 나라 이 시대엔 그런 영적인 거룩함, 종교적 신성함을 잃어버린지 오래요. 이름만 인자의 머리 둘 곳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예수는 떠나고, 온갖 장사아치 사기꾼들이 교회를 다 점령해버린 지금 다시 이곳에 기도원을 짓는다 하여 무엇이 달라질 것이 있겠소?”

“하지만.....”
“차라리 돌멩이 위에 돌멩이 하나 없는 황무지가 더 나을거요. 기도원보다 더 경건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요. 억지로 희망을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정직하게 절망을 바라보고, 이사야처럼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는 것이 더 정직하고 거룩한 행위일거요.” 수관 선생의 입가에 얼핏 곤혹스런 냉소 같은 것이 스쳐갔다. 남경희가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다 이곳은 이미 오염이 된지 오래요. 소들이 죽어나가고, 개들이 죽어나가고, 놀이시설을 짖겠다고 탐욕스런 인간들의 탐욕스런 발걸음이 시작된지 오래요. 그들과 맞서 싸우는 것은 그야말로 남선생이나 아버지를 위해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오.”

“그렇다면 이대로 순순히 물러서라는 뜻인가요?” 남경희가 항의라도 하듯 말했다. 하림은 묵묵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남경희 그녀가 그동안 이곳에 들락거린 이유는 단순히 침을 맞거나 침을 배우겠다는 이상의 뜻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마침 하림이 왔고, 이야기 나온 김에 수관 선생이 털어놓고 속내를 드러낸 것일 터였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수관 선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애처로울 정도로 변해있었다. 도도한 기세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수관 선생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떡 본 김에 제사라고 이왕 이야기 나온 김에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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