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은은한 펄(pearl)감에 연한 파스텔 톤으로 가득 찬 그림. 절제된 디자인과 정교한 공법이 만나 완성된 목가구. 전시장을 가득 메운 그림과 가구에서는 단순하지만 가볍지 않은 무게감, 오묘한 조화가 느껴진다. 그림이나 가구에서 어떤 형상이나 이미지를 찾아보긴 힘들지만 휴식과 위안을 얻게 하는 힘이 있다.
목수와 화가가 만났다. 20년 가까운 나이 차이, 매체의 다름에도 이들의 감수성은 닮아 있었다. 목수 이정섭(44)과 화가 김태호(62).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전시를 열었다. '공간 드로잉'이라는 화가의 시리즈는 크고 작은, 단순한 색으로 그린 그림들로 구성된다. 벽에 걸리기도 하고, 땅에 뉘어 있기도, 때론 세워져 있기도 하다. 한 공간 안에 배치된 수많은 그림들이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화가의 그림과 어우러진 목수의 가구는 질 좋은 물푸레나무나 너도밤나무를 골라 수차례 건조시켜 육중한 느낌을 주는 검은색을 띤다. 의자와 선반, 서랍장 등 네모꼴 가구는 모던하면서도 100년 이상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다. 전시장엔 두 사람의 최근작 50여 점이 배치됐다.
목수 이정섭은 남이 그린 도안에 맞춰 가구를 짜는 그런 목수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창작과 기능으로 분업화되기 이전의 그 목수라고 보면 된다"며 "마르크스가 '거미는 본능적으로 집을 짓지만 목수는 생각하면서 집을 짓는다'고 했다. 그런 정의에 부합하는 목수"라고 했다. 그는 원래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어릴 적 손재주 좋은 큰 아버지가 동네(경남 사천)에서 50년 이상 가는 튼튼한 집을 짓던 모습을 늘 기억했다. 그래서 '집짓는 학교'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후 지금까지 15년 동안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든다.
화가 김태호는 목수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에 있는 어느 농가의 창고에서였다. 내촌에는 목수의 목공소도 있다. 목수는 당시 비어 있는 농가 창고를 빌려 예술가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는데, 참여 작가 가운데 김태호도 있었다. 목수는 농가 창고 전시회를 10년이나 이어왔다. 당시 목수는 전시회의 사회를 마을 이장에게 맡겼다. 그때 이장이 한 말이 화가에게 오랫동안 큰 울림으로 남았다.
화가는 "잠방이를 입은 이장님이 연설을 해줬다. 최고의 감동이었다"고 기억했다. 김 화백이 이 목수와 함께 전시를 열고 싶어 한 이유는 '생활 노동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 있어서였다. 화가는 "나는 예술이 그리 대단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화가보다는 목수가, 목수보다는 농부가 더 대단하다고 본다"고 했다. 이 같은 사고 때문일까. 그의 그림 역시 노동집약적인 면이 많다. "사실 캔버스에 풍경이나 인물을 먼저 그려 넣어요. 그리고 수백 번 물감을 겹쳐서 그 모습들을 지워나가죠. 마치 눈이 오면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이는 것처럼요." 그는 "요즘 세상이 복잡하고 거칠어져서인지 작품들도 대체로 그런 현상이 많다. 나이 오십대 중반 이후가 되면서는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며 "내 그림으로 누군가 위로를 받고 편안해졌으면 한다"고 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극단의 극복'이다. '미니멀리즘'이라는 양식주의에 치우친 평가를 넘어서고자 하는 작가들의 의지가 담겼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란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표현을 아주 적게 하는 예술기법이다. 화가는 "색이 하나인 듯하지만, 사실 색이 겹쳐진 내 작품에는 색이 많다. 또한 그림 속에 표정과 감성이 있다"고 했다. 목수는 "사실 미니멀하게 작업하려던 게 아니다. 다만 무엇을 자르고, 간직해야 할지 고민한 결과일 뿐"이라며 "그렇게 욕심껏 진검승부를 하고 싶었을 뿐, 미니멀로 비춰지고 분류돼야 할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 우리가 굳이 서양미술사의 정의에 규정돼 불려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시는 오는 7월 5일까지. 서울 중구 소공로 신세계갤러리. 02-310-1922.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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