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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 너를 기다리는 동안/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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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착어: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초조하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두부 장수의 핑경 소리가 요즘은 없어졌다. 타이탄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온 사람이 핸드 마이크로 아침부터 떠들어 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어디선가 병원에서 또 아이가 하나 태어난 모양이다. 젖소가 제 젖꼭지로 그 아이를 키우리라.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오후 한 詩] 너를 기다리는 동안/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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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지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린다는 이유만으로도 죄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너에게 간다"는 다짐만으로도 투옥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아주 먼 데서"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믿고자 하는 그 마음만으로도 수배를 받고 도망 다녀야 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낱말들은 어쩌면 이젠 늙었지만 그 앞에서 우리의 삶은 여전히 '초조하다'. 여닫는 문 사이로 오월 햇살이 언뜻 눈부시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오고 있는 이여, 지금도 '녹'처럼 저미는 이여, "가슴 애리는" 너, 우리 모두가 "너"이고 "나"인 오월이여, 영원히 당도하지 않을 오월이여, 그리하여 끝끝내 희망이고 생명이고 삶이 된 "너", 오월 광주여.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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