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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의사들, 아픈 환자 곁으로 돌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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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의사들, 아픈 환자 곁으로 돌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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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물었다. “표씨 성을 가진 간호사 좀 찾아주세요. 이름이 기억이 안나서요. 중환자실에서 봤어요.” 원무과 직원이 엑셀시트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름을 알려줬다. 진료비 영수증 귀퉁이에 받아적고는 편지를 썼다. 선생님, 고맙습니다로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병원 고객의 소리 우체통에 엽서를 접어 넣었다. 주치의에게 감사 메모도 전했다. 의정갈등이 막 시작되던, 석 달 전 경기도 모 대학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머니는 낙상으로 경막외출혈·두개골 골절 진단을 받았다. 초응급 환자로 분류됐다. 긴급수술을 받았다. 2시간에 걸친 개두술, 외상응급센터 집중 치료, 의식회복의 시간이 천금 같았다. 3차 병원도 신경외과도 처음이었다. 의료진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 다행히 호전 속도가 빨랐다. 비탄은 희망으로 바뀌었다. 생명은 존귀하다. 위급한 순간 환자와 환자 가족에게 의사는 신과 같은 권능을 가진 존재가 된다. 그 힘은 숭고해서, 경각에 달린 누군가의 삶과 운명을 뒤바꿀 수 있다.

의정갈등의 세계관에 환자는 없다. 의사와 정부만 있다. 극단적인 설전과 소요만이 비춰진다. 불화·강행·맞불·직격·최종통첩 같은 단어들이 그렇다. 다툼과 대립, 공방·저격이 실시간 중계된다. 의사들은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기득권·엘리트 집단으로 악마화된다. 정부는 표를 위해 대책 없이 1500명 증원의 무리수를 던진 탐욕적인 졸속 행정가로 묘사된다.


악마·졸속 행정가로 구조를 의인화해서 도움 되는 건 많지 않다. 증원의 전제로 정부가 제시한 필수의료 패키지는 난제다. 재정투자가 필요하다. 건강보험료율 상향 법 개정은 어렵다. 조세부담률 인상을 전제로 한다. 3년 뒤 대선을 앞둔 정부가 이런 골치 아픈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란 정무적 추정이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꼼꼼한 행정부 견제와 감시가 필요하다.


일부 의사들은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을 피력한다. 5년간 10조원을 약속한 필수의료 수가 인상 자체가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건보 적립금이 바닥나면 백지수표·부도어음이 된다고 주장한다. 조세저항에 부딪혀 공염불이 될 것이라고 비관한다. 결국 종착점은 ‘아직은 시기상조’ ‘청사진부터 다시 그려라’ ‘증원을 무효화하라’ ‘한국 의료는 엉망이다’로 귀결된다. 배후에 있는 논증구조는 냉소·허무·회의 같은 감정적 요소들이다.

분명한 건 ‘당연지정제·독점 단일보험자’로 만들어진 가성비 좋았던 의료시스템이 저출산·고령화로 한계에 직면했다면, 증원을 고정값으로 두든 아니든 개혁의 대상이지, 그것 자체가 반대의 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의정갈등의 세계관에서 빠진 주체들이 많다. 아직도 중증외상센터를 지키는 의사들이 있다. 환자들도 있다. 18일 거점뇌전증지원병원협의체는 휴진 불참을 선언했다. “10년 뒤에 활동할 의사가 늘어나는 것을 막겠다며 당장 수십만 명의 중증 환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홍승봉 거점뇌전증지원병원협의체 위원장)이라고 했다. 환자 곁을 떠난 의사들이 되새겨야 할 말이다.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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