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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컬처]아이도 노인도 아줌마도 출입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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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즈존 등 우리말 팻말 안쓰고
영어 사대주의에 숨어 차별 자행

[시사컬처]아이도 노인도 아줌마도 출입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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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여럿이 함께했던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요리 경연 프로그램이 대화 주제로 나오자 여성 A가 자기 남자친구도 차이니스 레스토랑 셰프라고 직업을 밝혔다. 이런저런 대화가 더 이어지던 중 다른 동석자 B가 ‘중국집 주방장’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문제가 생겼다. A가 자기 남자친구는 ‘중국집 주방장’이 아니고 ‘차이니스 레스토랑 셰프’라고 반박한 것이다. 그러자 또 다른 동석자 C는 둘의 차이가 뭐냐고 반문했고 나 역시 궁금해졌다. 차이니스 레스토랑과 중국집, 셰프와 주방장은 뭐가 다를까? 그날 대화의 결론은 기억나지 않고 내 궁금증도 풀리지 않는 채로 남아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어와 우리말이라는 것 외에는 차이를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우리말(한자어를 포함한)의 의미를 회피하고 싶을 때 종종 영어로 위장막을 쓰곤 한다. 특히 좀 더 고급스럽고 세련된 느낌을 원할 때 영어를 덧씌우는 경우가 많다. 아마 위의 사례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이런 경우는 매우 흔한데, 사적인 대화를 넘어 언론 매체에도 등장하고 공식 명칭에 반영되기도 한다. 혹은 노골적인 의도를 감추고 싶을 때 영어 표현을 선호하기도 한다. 어린아이 출입을 막는 가게를 가리키는 ‘노키즈존’을 우리말로 옮기자면 ‘아이 출입 금지’가 될 텐데, 식당에 우리말 팻말이 붙어있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최근에는 ‘노키즈존’에 이어 ‘노시니어존’이 등장해 논란이 불거졌다. 시끄럽게 떠들거나 뛰어다니면 다른 손님들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출입을 막는 가게들처럼, 노인들이 영업에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다. 사례는 다양하다. 수영장은 샤워 안 하고 풀에 들어오는 노인들이 있다는 이유를, 카페는 너무 오래 머무는 노인들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자영업자들의 고충은 인정하나 이런 방식은 딱히 논의할 필요도 없이 명백한 차별이며 혐오다.


중년이나 청년 세대에서도 수영장에서 비위생적인 행동을 하거나 카페에 오래 앉아있는 손님들이 있을 테니까. 노인들이 모두 그런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노년층에서 유독 그런 경우가 많다는 주장도 소위 뇌피셜일 뿐 근거가 없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인 동시에 의식의 반영이기도 하다. 차이니스 레스토랑 셰프인 남자친구를 중국집 주방장이라고 부르자 불쾌해했던 그녀의 에피소드는 아직 사대주의 문화가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당당하게 우리말로 ‘출입 금지’ 팻말을 붙이지 못하고 노키즈존과 노시니어존임을 내세우는 가게들은 영어 사대주의에 숨어 차별과 혐오를 자행하는 셈이다. 이러다간 아줌마 아저씨를 막는 가게도 생길 판이다…. 라고 쓴 후에 찾아보니 이미 생겼다.


인천의 한 헬스장에서 떡하니 ‘아줌마 출입 금지’ 공지를 붙였다. 중년 여성들이 탈의실 비품을 훔치거나 샤워장에서 빨래하는 등 무례한 행동을 일삼아 피해를 봤다며 ‘교양 있고 우아한 여성만 출입을 허용한다’고 경고문에 적어놓았다. 이 사례는 외국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 BBC 방송에서는 노키즈존과 노시니어존도 함께 언급하면서 한국에서 특정 집단을 배척하는 경향이 생겼다고 지적했다. 혹자는 유행이나 문화현상이라고도 일컫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차별과 혐오는 유행이나 문화의 범주에 들 수 없는 야만적 행위다. 나는 노인도 아이도 아줌마도 아니지만 이런 식의 출입 금지 구역에 반대한다.

이재익 SBS 라디오 PD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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