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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고영환 "통일 지우는 北…극도의 혼란 겪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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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육원장, 1991년 탈북 김일성의 통역가
北, 철저한 쇄국 정책으로…장마당 세대 주목
말실수 인생 걸린 北…자유 느낄 때마다 감사

"북한에서 가장 신성한 가치는 '조국 통일'이다. 모든 고난의 이유는 통일을 못 해서다. 김일성·김정일 시대의 최대 업적도 '조국 통일을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휴가 좀 쓰겠다고 했다가 '조국 통일도 안 됐는데 무슨 휴가야'라고 하면 한마디도 못 할 정도다. 그런데 김정은이 갑자기 통일하지 말라고 하니 주민들은 '멘붕'이 안 오겠나."


고영환 국립통일교육원장이 서울 수유리 통일교육원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고영환 국립통일교육원장이 서울 수유리 통일교육원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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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외교관' 고영환 국립통일교육원장(71)의 말이다. 뛰어난 프랑스어 실력으로 김일성 주석에게 직접 표창까지 받은 그는 북한 외무성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는 '접견자' 신분이었다. 1991년 5월 콩고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하다 남한으로 망명하면서 '1호' 탈북 외교관이 됐다. 올해로 34년째 서울에 살고 있다. 남과 북에서 절반씩 지낸 셈이다.

최근 북한산 기슭에 자리 잡은 통일교육원에서 고 원장을 만났다. 그는 국가정보원의 싱크탱크 격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26년간 부원장을 지냈다. 이후 통일부 장관 특별보좌역을 거쳐 지난달 통일교육원장에 임용됐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벽에 걸린 커다란 지도가 시선을 끌었다.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 3성과 연해주까지 표기된 지도였다. 매일 아침, 한국이 대륙으로 뻗어나갈 '통일'에 대한 의지를 다지기 위해 이 지도부터 걸었다고 한다.


최근 북한 동향에 대한 고 원장과의 일문일답.
고영환 국립통일교육원장이 서울 수유리 통일교육원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고영환 국립통일교육원장이 서울 수유리 통일교육원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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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통일 지우기'에 나섰다. 이런 대남전략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나.

아버지 때도 그랬고, 내가 살던 시대에도 그랬다. 북한에선 첫째 목적이 '조국 통일'이다. '지금 너희가 하는 모든 고생은 조국 통일을 못 했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언젠가 다도해 바닷가에 시원하게 발을 씻고 제주도 한라산에 올라가서 공화국기를 흔든다' 이런 문장이 뇌리에 박혀 있다. 그런데 김정은이 '통일'과 관련된 걸 다 지우게 하고 노래 가사까지 바꾸게 하니 주민들은 상당한 혼란을 느낄 거다. 여태껏 왜 고생했지, 내 인생과 그간의 고난은 헛된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할 것으로 보인다.


대남 기구들을 정리한 데 이어 휴전선에서 방벽을 쌓는 움직임도 연일 포착된다.


국방부에선 대전차방벽이라고 하던데, 조금 더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북한은 이미 휴전선 뒤에 산더미만 한 바윗돌로 장애물을 만들어 놨다. 탱크가 지나갈 수 없게 말이다. 그런데 구태여 또 반탱크호(대전차방벽)를 만들까 싶다. 동서 해안에 대한 철조망까지 강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는데, '우리는 이 안에서만 살겠다' 하는 철저한 쇄국 정책으로 가려는 게 아닌가 싶다.


휴전선뿐 아니라 북·중 국경도 마찬가지다. 국경을 따라 철조망을 둘러치고 그 앞에 구덩이를 판다. 거기에 사람이 지나갈 수 없도록 커다란 대못을 잔뜩 박은 나무판자를 깔아놓는 거다. 이런 작업을 2~3년 전부터 해서 거의 완성 단계에 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움직임은 2019년 '하노이 노 딜' 때가 기점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여정이 '다른 나라처럼 서로 참견하지 말고 살자' 이런 말도 하지 않았나. 이후 김정은이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다 들어내라'고 했고, 지금의 '두 국가론'까지 온 것으로 본다.


외부의 접촉이나 정보 유입을 단순히 물리적으로 막겠다는 건가.


북한의 MZ세대라 부르는 '장마당 세대'는 한류를 굉장히 동경한다. 이 세대의 기본적 특징은 '당과 수령이 우리한테 해준 게 없으니 나도 빚진 게 없다'는 개념이 대단히 강하다. 또 '나는 우리 아버지·어머니처럼 (고생하며) 살지 않겠다' 이런 생각이 뚜렷하다. 우리가 의도했든지, 의도하지 않았든지 한류 유입에서 비롯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이 주민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고 힘을 얻으니 지도자(김정은)로선 '아예 막아놓지 않으면 체제가 위험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것이다.


북한 평양 금수산지구 노동당 중앙간부학교 내 혁명사적관 외벽에 김일성·김정일에 이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상화가 나란히 내걸려 있다.

북한 평양 금수산지구 노동당 중앙간부학교 내 혁명사적관 외벽에 김일성·김정일에 이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상화가 나란히 내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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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중앙간부학교에 마르크스·레닌 초상화가 걸렸다. 마르크스·레닌 사상의 한계를 대체한 게 김일성의 '주체사상'인데, 선대 지도자를 부정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이데올로기적 변화도 '통일 지우기'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나.


과거 김일성 광장에서 보면 대외경제성 건물에 마르크스·레닌의 초상화를 참 오랜 시간 걸어놨다. 이후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띄우고 우상화를 본격화하면서 내렸는데, 느닷없이 김정은이 두 사람의 초상화를 다시 내걸었다. 이런 행동 역시 '통일 지우기'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통일을 없앤다는 건 결국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업적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자신이 선대보다 나은 지도자라는 선전이다. '지난 10년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못한 핵 강국을 건설했다' '그럼 나는 선대와 비교할 게 아니라 마르크스·레닌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에 견줄 수준까지 올라선 것 아니냐' 이런 의미로 해석된다.


이제 삼대(三代)의 초상화가 걸리기 시작했다.


거기서도 차이가 보인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김정은의 시선은 오른쪽을 향한다. 초상화로 내걸기 위해 숱한 사진들을 찍고 골랐을 건데, 하필 정반대 방향으로 시선 처리가 된 사진을 골랐다는 건 김정은의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향한 시선에 담긴 의미는 '나는 선대의 길을 따르지 않고, 나만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남과 북에서 인생을 절반씩 살아
고영환 국립통일교육원장이 서울 수유리 통일교육원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고영환 국립통일교육원장이 서울 수유리 통일교육원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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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온 지 햇수로 34년째다. 남과 북에서 지낸 세월이 비슷한데, 소감이 어떤가.


북한에 있을 땐 김일성의 통역을 담당했으니, 외국어 하는 사람으로선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본 셈이다. 김일성이 '저 사람 참 똑똑하다' '국산인데 외국어를 참 잘한다' 이러니, 한 번은 외무성 당 비서가 "이제 고 선생을 다칠(해칠) 사람은 없다"고 하더라. 그런데도 항상 괴로웠다. 나만 잘한다고 잘 사는 게 아니라, 가족의 말실수 한 번으로 온 가족이 끝장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형이 밤 11시 정도 우리 집 문을 두들겨서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북한에선 해가 진 뒤로 절대 남의 집에 가지 않는다. 밤늦게 문을 두들기는 건 보위부밖에 없다. 이렇게 매일 두려움 속에 살다가 남한에 오니 '자유'가 보였다. 요즘 사람들은 아무리 높은 사람이 전화해도 늦은 밤엔 '못 봤다' 하고 전화를 안 받지 않나. 그런 사소한 것부터 자유라는 느낌을 받는다.


'자유'라는 측면에서 남과 북을 비교할 만한 일화가 더 있나.


무엇보다 발언이 자유롭지 않나.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고, 하다못해 대통령을 비난하고 정치인을 욕해도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한 번은 김정일이 외무성 간부에게 넥타이를 선물했는데, 어느 날 행사장에서 그 넥타이를 보고는 '넥타이가 왜 이렇게 후졌어'라고 꼬집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이 넥타이 장군님께서 선물해주신 겁니다" 해놓고, 순간 등에 식은땀이 쫙 흘렀다고 하더라. 수령의 말을 부정해버린 것이다.


다행히 김정일이 다른 사람 쪽으로 시선이 가서 그 사람과 이야기한 덕분에 살았다고 했다. 북한이 이렇다. 당 중앙위원회 간부면 우리 장관급보다 높은 자리인데, 그런 사람들도 말 한마디 잘못하면 죽을 고비를 넘나드는 곳이다.


국립통일교육원.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국립통일교육원.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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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을 비롯해 탈북민 출신 고위직이 꾸준히 나온다. 기관장까지 오른 소감은 어떤지.


하루는 어떤 사람이 와서 '선배님이 외무성 레전드'라고 하더라. 북한 외교관들은 해외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휴대전화를 빌려 검색을 자주 한다. 김정은, 리설주, 김여정도 검색해보고 먼저 한국에 간 선배들은 어떻게 사나 검색해본다고 한다. 그러다 '아 누가 국회의원이 됐네' '아 누구는 부원장을 하고 어디 원장도 한다고 하네' 한다는 것이다. 북한에선 월북자에게 어떤 직책을 준다고 해도, '선전용' 보여주기 수준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정말 자기 능력껏 실질적으로 역할을 갖고 살아가지 않나.


우리들의 삶은 북한에 있는 후배들과 주민에게 '언젠가 일이 생겼을 때 나도 남한으로 가면 잘살 수 있겠구나' 하는 메시지다. 아직 '유리천장'이 있지만, 태영호 전 의원과 같은 분들처럼 계속 뚫고 나오는 시도들이 동포에게 굉장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잘못해서 과오를 남기면 한국 사회에서 탈북민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는 것뿐 아니라, 후배들이 올 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탈북해온 동료들과 만나면 '우리 정말 잘 삽시다' '끝까지 명예롭게 합시다' 이렇게 인사를 나눈다.


북한 주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북한에 있는 동포들도, 우리 국민들도 '통일'에 대한 염원을 잃지 않길 바란다. 우리가 계속 등대처럼 북한에 있는 주민들을 향해 빛을 반짝여야 한다. '어느 날엔가 통일이 되면 우리도 저들처럼 잘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의 메시지다.


(북한에 있는 주민에게) 당신들은 외롭지 않다. 같은 피를 가진 민족, 5000년 동안 같은 말과 같은 문화를 향유해온 동족이 여기 있다. 우리가 당신들을 생각하고 있고 당신들의 인권과 자유를 위해 계속 애쓰고 있다.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


통일교육원장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통일'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게 노력하겠다. 하루는 교육원에 고등학생들이 와서 한반도 지도를 펼쳐놓고 까르르 웃으면서 여러 활동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린 학생들도 '왜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하다가, 통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대화하다 보면 고개를 끄덕인다. '토크쇼'처럼 통일이라는 주제가 무겁지 않게 느껴질 수 있는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국민에게 다가가는 통일교육을 위해 애쓰겠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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